아이들적인삶


방학이 시작되고 사무실 이전을 얼추 마치고 나니 소란을 떠는 애들이 사라진 고요한 하루하루가 간다. 다소 '방'처럼 생긴(실제로 '방'이었던) 좁은 공간에 조용히 앉아 있다보면 별별 잡스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넘겨야할 서류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치워 가면서도 잠깐씩이나마 자주 깊은 회한(-_-)에 젖어버리곤 한다. 3주간의 PMS가 지속되는 히스테리컬한 기간중이어서 더더욱.

오전에 만나기로 한 수료를 준비하는 그룹이 안오고, 늦고, 와서는 왜 해야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지난 2-3년간의 학습이 자신에게 아무런 학습의 동기도, 건널목도, 미래를 준비하는 이유도 되지 않기때문에 한장짜리 페이퍼를 지난 2주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어떤아이는 역시 세상은 학벌과 간판이 있는것이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건 지난 2년간 함께 공부했던 나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누군가를 한번 만나서 알게된 사실이라고 한다. 내가 이애들을 이년이상 만나면서 지껄인 수많은 말들은 어디로 흩어진걸까.

어떤 아이는  자신의 학습의 결과물과 평가서들이 웹상에서 사라진것에 대해 분개한다. 그리고 그 이유와 과정에 대해 묻지도 고려하지도 않은채 다짜고짜 자신에게 사과하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방식의 소통을 알려준적도, 그렇게 중요한 자신의 권리와 당당함을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맥락에서건 주장하라고 주입한 적도 없다. 나는 언제나 변함없이 진심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상황과 맥락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라고 믿는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왜 이아이는 이런 말을 하고 있는걸까.

어떤 아이들은 아무런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것이 슬프다. 아버지는 성실히 일해 돈을 벌지 않고, 아이가 보기에 늘 허황된 사업을 구상한다고 한다. 아이는 벌써 여러회 수업료가 밀려있고, 아이의 힘으로는 당연히 그것을 충당할 수 없다. 아이는 아버지를 원망하지만 동시에 사랑한다. 아이는 이 우연한 만남의 그룹을 가족이라 불러야 하는것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어딜가나 자신을 돌봐달라고 사랑해 달라고 말한다. 나는 아이에게 돈을 줄수도, 사랑을 줄수도, 가족을 줄수도 없다. 

출근중에 건널목 앞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다가 일군의 10대들을 보았다. 많아봐야 열여서일곱쯤 되어보이는 네명의 남자애들이었다. 길거리에서 보란듯이 담배불을 붙치고는 자동차들이 씽씽 달려대는 대로변을 신호를 무시한채 뛰어들었다. 달리던 차들이 급정거를 하고, 아이들이 시시덕 거리며 운전사들을 비웃었다. 결국 파란불이 켜지기 전에 아이들은 길을 혼잡스럽게 만들고 길을 건넜다. 나는 이 아이들과 한순간도 이야기를 나눈적이 없지만 위험하게 뛰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쫒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어느날 한밤중의 편의점에서 도둑질을 하다 걸린 한 아이를 세워두고 호통치는 주인과 그 아이를 데리러 와서 아이의 왕따 경험과 또래들에게 얼마나 폭행을 당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며 용서를 구하는 늙은 어머니를 보면서 자리를 뜨지 못한 적이 있다. 아이의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고 눈빛은 약을 하는 애들처럼 풀려있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서럽게 울기만 했다. 이 아이는 어떻게 삶을 견뎌 왔고, 또 앞으로 견딜 수 있을까.

'아이들 적인 삶'이 있다면 무엇일까 묻는다. 모든 학습과 경험은 체화embody하기위해서, 혹은 내면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empower 필요한 것이라고 애들에게 습관처럼 말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언어놀음같은 것은 필요없다. 필요한건 돈, 어디서든 통용되는 간판, 질서를 깨는 순간의 아찔함, 힘센 자에 대한 동경과 분노, 혹은 (타인없는) 자신의 권익에 대한 예민한 반응이다. 그러고 보니, 이건 특별히 '아이들적인 삶'은 아니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어른들의 삶이 이것의 한 두서너배쯤은 되는 것들을 욕망하고 또 욕망하지 않았나.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만나는 누군가를, 혹은 동료를, 혹은 친구를 만난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젠 그만 '아이들'을 만나야 할때가 온건 아닌가. 하고 느끼곤 한다. 이제 사십줄을 바라보게 되니 그냥 별볼일 없는 '꼰대'가 되어 가는 건가? 아니면 그저 잘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실패를 거듭하자 그저 속절없는 짓이다. 라고 생각해 버리려는 것일까. 혹은 어른들에게 느끼는 실망에 비해 아이들에게 느끼는 실망은 배신에 가깝다는 생각인건가. 피곤한 날들이다.

by siren | 2009/01/08 19:32 | t/here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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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01/09 13: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at 2009/01/09 17:15
:D
Commented at 2009/01/10 22:4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at 2009/01/13 17:14
it's weird somehow I cannot type korean... here. Anyway, get better! I wish I can send "all day in warm bed" kind of things to you as a gift.
Commented by 세이랜 at 2009/01/13 19:09
걍.. 침대 되았고..(ㅋㅋ) 너 혹시 시애틀에 있는 Evergreen College라는 곳에 대해서 좀 알아봐 줄수 있남? 거기에 제프라는 마이미스트와 우리가 인연이 좀 있는데, 좀더 네트워킹을 해보고 싶기도 하고, 왠지 제프의 전력으로 보아 너도 알아두면 즐거울거 같은데..
Commented by 재중러버 at 2009/01/14 16:03
침대 그거 저 좀......ㅎㅎㅎㅎㅎㅎㅎ -.-;;;;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참 어렵고도.....
술한잔 하러 놀러오삼...요즘 손님도 없는디...ㅎㅎㅎㅎ
Commented by 세이랜 at 2009/01/16 13:56
그라게..술한잔 하러가야지..하면서도 자꾸만 여유없이 마음이 조급하기만 하고요... 조만간 가겠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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